운경유치원 지나간 나날들

원장 유경손의 회고(유경손 저,'나를 택하여 주신 하나님')를 중심으로 운경유치원의 지나온 나날들을 소개합니다.


1. 개원(1959)

어렵게 얻은 아들을 유치원에 보내고자 여기저기 수소문하였으나 마땅히 보낼 곳이 없었다. 이번 기회에 중앙여자전문학교(현 중앙대학교)와 조양보육사범학교(현 경기대학)에서 강의하던 내용도 실제 교육에 적용할 겸 과감하게 유치원을 설립하기로 작정하고 나운영 선생께 조심스럽게 의견을 물었다. 걱정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너무나 혼쾌히 승낙하여 주셨다.

당시 성남교회(현 서울성남교회)는 같은 구내에 한국신학대학 건물과 교수들의 사택이 있었는데, 한국신학대학이 수유리의 넓은 땅에 새교사를 건축하고 이전하게 되어 이 성남교회 구내에 있던 사택을 매각하게 되었다. 나는 속으로 이 사택이 바로 교회 울타리 안에 있는데 외부 사람에게 팔려 예배 드리는 시간에 장구 치고 술 먹고 떠들어 댄다면 큰일이라고 생각되어 교수 사택 2채를 우리가 사서 한 채는 주택으로 한 채는 유치원으로 사용하기로 하고 정들었던 청파동 집을 팔고 동자동 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 동자동 집은 두 집이 같이 붙어 있어서 정 대위 목사님이 사시던 집은 내부를 전부 뜯어서 큰 홀로 고치고, 전 형연 박사님이 사시던 집은 살림집으로 손질을 해서 살았다. 특히 출입구가 교회와 함께 쓰는 마당을 통해 들어올 수 있었기 때문에 주변의 좋지 않은 환경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다.

드디어 1959년 6월 4일,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을 기해 원아 7명으로 동자유치원(현 운경유치원)을 개원하였다. 이사장 나운영, 원장 유경손, 그리고 지정희 선생과 황연숙 선생이 교사로 수고해 주었다. 성남교회 교인 자녀를 중심으로 시작하였기 때문에 목사님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셔서 큰 행사는 성남교회 예배당을 이용하여 성대히 치를 수 있었다.


2. 1960~61년도 성남유치원으로 명칭변경

어떻게 소문을 듣고 왔는지 다음 해에는 성남교회 교인 자녀들 뿐만 아니라 인근 각처에서 원아들이 모여 모두 35명의 원아를 데리고 입학식을 거행하였으며 유치원 이름도 성남유치원으로 명명하였다.
음악에 나운영,아동문학에 강소천,미술에 백영수,무용에 조동화 선생 등 쟁쟁한 실력자들을 고문으로 모시는 한편 보육교사로는 지정희 선생과 황현숙 선생,미술강사로는 신영헌 선생을 모셨다. 신영헌 선생은 이후로 15년간 계속 미술 지도를 해 주셨다.

창립 기념 축하행사도 갖고, 중앙방송국,기독교방송국 등에 출연하여 유치원 노래모음을 방송하기도 하였고,소풍이나 견학을 갈 때면 온 가족이 총동원되어 동네잔치하듯 떠들썩하게 다녔다.

크리스마스 행사도 교회에서 축제처럼 거창하게 치루는 등 피곤한 줄 모르고 정신 없이 지내다보니 어느덧 한 해가 다 가고 졸업을 시킬 때가 되었다.
1961년 12월 서울시교육위원회로부터 설립인가를 받은 후 원아 27명으로 제2회 졸업식을, 원아 23명으로 제3회 졸업식을 거행하였다.


3. 1962~69년도 초창기의 모습들

1962년도에는 도춘옥,박종해 선생이, 1963년도에는 윤경자, 노원혜 선생이, 1964년과 65년에는 윤경자,박애자 선생이, 1966년에는 박애자,현수삼,박경애 선생이,1967년에는 박애자,나인화 선생이, 1968년에는 박애자,김경은,최혜란 선생이, 그리고 1969년에는 김경은,최혜란,김성희 선생이 보육교사로 수고해 주셨다.
원복도 맞추어 교사는 물론 원장까지 모두 원복으로 갈아 입고 견학을 나가면 모두들 눈이 휘둥그래져 쳐다볼 정도였고,생일잔치도 지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풍성하게 치렀다. 텔레비젼 방송국에도 출연하여 무용과 합창을 선보였고, 서울중앙방송국,기독교 방송국에는 계속 출연하여 유치원 노래모음을 방송하였다.

1963년에는 서울교대 주최 전국아동미술실기대회에 참가하여 7명이 장려상과 입선을 하였고 1964년에는 특선1명,가작 1명,입선 12명이 당선되는 등 신영헌 선생의 지도로 아이들의 미술실력이 날로 향상되었다.
비원,덕수궁,일영,창경원 등으로 소풍을 가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며, 특히 어머님들이 지금과 달리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셨다.

1969년 제11회 졸업식까지 총 26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지역적으로도 양동,도동(당시 사창가)을 지나야 올 수 있는 열악한 환경과 다 헐어빠진 가옥을 수리해서 낮에도 전기를 안 켜면 어두컴컴했던 유치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른 교육을 위한 열망으로 자녀들을 열심히 보내 주셨던 부모님들께 지금도 깊이 감사 드린다.


4. 1970~77년도 동자동 시절

10여년을 유아들과 생활하면서 만6세 이전에 예술적 재능의 토대가 완성되어감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두성발성훈련,절대음감훈련 등 새로운 교육법을 개발하고, 이론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실제 현장에서 적용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음계를 무지개 색에 적용하여 유아들이 쉽게 친숙해 질 수 있도록 하였는데, 바닥도 무지개 색으로,의자도 무지개 색으로 칠하여 음계를 통한 놀이를 개발하였다.

이러한 교육의 효과가 소문이 났는지, 먼거리에서 운전기사를 딸려 보낼 정도로 부모들이 더 적극적으로 유치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1년에 한번 개원기념일을 맞아 아버지날 행사를 할 때면,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만한 아버지들도 거의 다 나오셨고, 서로 만나서는 깜짝 놀라며 "자네 아이도 여기 다니나?"하면서 반가워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분들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받은 적은 없지만 가끔 그분들이 운영하시는 기관의 혜택을 받아 어린이들이 견학을 간다든지 놀이동산을 이용한다든지 하는 일은 있었다. 이 기회를 통해 그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1971년 2월 18일 한국일보사 12층 리사이틀홀에서 제1회 운경어린이 졸업연주회를 개최하기 시작하였고 이 졸업연주회의 행진은 현재까지 꾸준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1977년 제19회 졸업식까지 모두 479명이 졸업하였는데,1970년도에 부임한 임희순 선생은 청담동으로 이전하기까지 원감으로서 나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어 운경유치원의 새로운 변신을 이룩할 수 있도록 하여 주었다.


5. 청담동 시절 1978~90년도

서울성남교회는 날로 부흥 발전하여 열악한 그 지역의 청소년을 선도하는 복지관이 필요했고, 우리는 유치원이 좁아 좀 더 넓은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유치원 건물을 교회에 팔기로 하였으나 교회 재정이 일시불로 대금을 줄 수 없어 매년 교회 형편이 닿는대로 나누어 받기로 했다.
드디어 압구정동 51-1(현재는 청담동)에 287평의 대지를 마련하여 원사를 신축하였다. 유치원을 동화의 나라처럼 짓고 싶어 건물에 탑도 세우고,계단도 2층에서 미끄럼을 타고 직접 내려올 수 있게 하였고,발바닥 모양의 수영장도 만들었다.

그동안 30명 정도의 소수의 어린이만 가르쳐 오다가 3학급 120명을 모집하게 되니 모든 교육내용이나 행사등이 변화할 수밖에 없었고,두성발성,음감훈련 등은 전 원아에게 실시하였지만,동자동 시절처럼 모든 원아에게 기악지도를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특별히 음악교육을 집중적으로 시키기 위해 1학급만 음악반으로 편성하였고, 음악학원도 함께 설립하여 <종달새반>은 오전에는 유치원 교육을 오후에는 음악학원에서 기악레슨 및 음악활동을 하게 되었다.

유치원은 모범유치원 표창을 2차례나 받았고 나는 대한민국 국민포장(훈장)을 수상하였으며,포일동에 자연학습장을 설치하고 당시에는 파격적이었던 개방교육을 실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유치원과 음악학원이 연계되어 비로서 운경가족이란 말이 실감날 정도로 재미있게 아이들과 생활을 하였으며, 특히 당시에는 힘들다고 외면했던 만3세반을 모집하여 <모차르트반>이라 이름 짓고 3년 동안 충분한 교육을 실시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압구정동 일대가 패션가로 바뀌기 시작하였고 첨단의 유행을 추구하는 이 지역에서 유아교육을 계속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고심 끝에 드디어 가락동으로 이전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6. 가락동 시절 1991~2006

우리는 송파구 가락동 경찰병원 맞은편에 대지 125평을 사서 지하1층,지상 4층으로 평소 원하던대로 벽돌집 건물을 지었다.
지역적 여건으로 인해 유치원 운영이 어려울 때가 많지만 우리는 이 건물을 1층 일부만 빼놓고 모두 유치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아침마다 유치원에 나오면 원아들이 "선새미 선새미 원당 선새미"하며 달려와 안기는 천진스럽고 사랑스러운 어린이들을 교육하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설립자이신 나운영 장로가 '내 손에 피가 마를 때까지' 하나님 찬양하는 성가를 만들겠다고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키며 하늘나라로 가셨듯 이제 나도 '내 몸에 피가 마를 때까지' 유아교육에 전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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